비를 바라보며 한 시간

며칠 동안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맥주를 사러 나갔다. 비는 한참 오다가 잠시 소강상태였다. 먹구름이 여전히 하늘을 뒤덮고 있었으나 갔다 오는 데 15분이면 충분하므로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고 투웡빌리지 BWS에 도착했다. 어떤 맥주를 마실까 두리번거리다가 만만한 XXXX Gold 30캔들이 상자를 38불 주고 샀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 볼까. 아, 이런. 장대비가 쏟아진다.

하지만, 무슨 걱정인가. 할 일도 없고 기다릴 사람도 없고, 그냥 비 그칠 때까지 앉아 있자. 휴대전화와 MP3 플레이어는 집에 놓고 왔다. 잠을 청하려 해도 졸리지 않다. 지하 주차장, 출구가 보이는 벤치에 않아 하염없이 소나기를 바라본다. 좌우에 앉았던 아주머니들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전화한 손님을
바로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인도인 맥시택시 기사는 20분 뒤 쓴웃음 지으며 주차장 밖으로 나간다. 남들이 뭘 하든, 나는 나대로 초지일관 아스팔트를 강타하는 비와 다양한 브랜드의 승용차, 허둥대는 사람을 관찰한다.

인생 낭비인가? 소중한 삶의 순간을 이렇게 멍하니 소모해야 하는 게 억울하지 않은가? 뭐, 그럼 어때. 난 현대인이 가장 하기 어려워한다는 일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치.

비의 공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 부릅뜨고 목격한 지 한 시간, 페이드인하는 햇살과 함께 빗줄기는 점차 약해지고 귀가할 시간이 찾아왔다. 한 시간, 의미 없는 그 시간이 왜 그리 아쉽던지.

by 소갈비맛나 | 2009/12/22 16:53 | 잡담 | 트랙백 | 덧글(0)

가을을 기다리며 - 500일의 썸머

여름은 괴롭다.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조금만 움직이면 땀으로 흠뻑 젖고 온몸에서 열이 후끈후끈 난다. 맥이 빠져 쓰러질 때쯤, 드디어 가을이 찾아온다.

사랑은 괴롭다. 운명이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눈물도 나오지 않을 만큼 지독한 괴로움으로 발버둥치다 끝난다. 진통이 가라앉고 집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때쯤, 드디어 인생에 눈을 뜬다.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는 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젊음과 좌절, 갱생, 그리고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캐릭터의 연령대를 줄이고 냉소적인 유머를 쪽 빼놓은 듯한 담백한 맛이 난다.

500일 사이를 종횡무진 왔다갔다하는 기발함과 뮤직비디오 풍의 경쾌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흔한 로맨틱 코미디에 질려 버린 사람에게는 한여름 오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다가올 것이다.

여름은 괴롭다. 사랑도 괴롭다. 하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인생의 한 조각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흘려보내자.

by 소갈비맛나 | 2009/12/21 06:21 | 놀이 | 트랙백 | 덧글(0)

크리스마스 연휴

샤프스톤에서 ICTE로 옮길 때 1주, ICTE에서 첫 세션 끝나고 1주 쉰 걸 빼면 딱히 방학이라고 부를 만한 기간 없이 약 7개월간 계속 학교에 나갔다. 물론 출석률 100%를 유지하면서. 그래서 이번 2주 크리스마스 연휴가 정말 반갑다.

3박 4일 시드니 여행을 빼면 특별한 계획은 아직 없다. 그저 푹 쉬면서 쌓아 둔 게임과 영화를 즐기며 재충전하고 싶을 따름이다.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의 캐릭터는 벌써 12레벨이며, 지난 금요일에는 극장 가서 <아바타>를 관람했다. 소포로 받은 <듀마 키>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2권은 책장에서 대기 중이다.

집에 콕 박혀 있으면 덥기도 하고 답답해서 도서관을 전전하고 있다. 무더운 낮에는 에어컨 빵빵한 주립 도서관에서 피서를 즐기고, 제법 선선한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맛있게 밥해 먹고 뒹굴뒹굴하고. 편의성과 경제성을 겸비한 최고의 조합이 아닐까 한다.

크리스마스날 뭘 해야 하나, 살짝 고민이긴 하다. 그렇지만, 여긴 눈은커녕 땡볕에 몸이 녹아날 지경이라 별로 외롭지도 않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모여 맥주나 실컷 마시면서 보내야지.

조금 있다가 코즈마트 가서 50불 상품권으로 2주간 먹을 일용할 양식을 듬뿍 살 생각을 하니 더욱 행복해지는구나.

by 소갈비맛나 | 2009/12/20 12:35 | 잡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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