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게 병

남들은 사고 싶은 물건이 넘치고 넘쳐 10개월 무이자 할부 버프를 적극 활용해 사고 또 산다. 그런데 난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놓아둘 공간도 있음에도 물건을 사지 못한다.

나라는 인간을 내가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까닭이다. 난 어떤 상품을 사고 싶은 충동이 일 때마다 그 상품의 가격 대 성능 비와 사용기를 꼼꼼히 살피며 분석하고, 실제로 소유했을 때 그것을 얼마나 유용하게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 예상하고, 이 모든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짜증과 스트레스, 추가 비용을 고려한다. 물론 이 과정을 몇 번 거치고 나면 소비 욕구는 싹 가셔 버린다.

예를 들어, 아이패드가 그렇다. 일견 매력적인 이 기기는 나에게 전혀 쓸모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컴퓨터와 게임 콘솔을 제외한 플랫폼으로 거의 게임을 하지 않고, 풍부한 앱에 별 관심이 없으며, 집과 회사에서는 모든 일을 데스크톱으로 처리하고, 이동할 때는 피곤해서 무조건 잠을 자며, 집에 누워서는 차라리 TV 보는 게 더 편안하다. 이러한 마당에 거금 60만 원을 쓸 이유가 있을까? 더군다나 함께 액정 필름과 케이스, 키보드 등 액세서리도 사야 하고, 흠집 나지 않을까 떨어뜨리지 않을까 잃어버리지 않을까 늘 조마조마해야 하는 부담도 짊어지고 가야 한다.

이렇게 너무 이성적으로 따지다 보니 결국 주위에 쌓이는 게 하나도 없다. 비인간적이고 탈인간적으로 메말라 간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에게 여자친구가 잘 생기지 않는 것도 지나치게 논리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탓일지도 모른다. 몇 번 만나 보다가 그 사람의 말투와 표정, 정황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미리 결론을 내리기 일쑤다. 사실 연애라는 게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인데도 말이다.

약간 허술하더라도, 약간 찌질하더라도, 때로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으로 저질러 버리는 모습도 필요할 듯하다. 내가 아는 나는 절대 이럴 분이 아니지만, 가끔은 자아를 무시하고 과감하게 내지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지금처럼 행동하다가는 합리적인 독거남으로 평생 깔끔하게 살 것 같으니까.

by 소갈비맛나 | 2012/01/27 23:22 | 잡담 | 트랙백 | 덧글(1)

Small world

평도 좋지 않고 스토리도 뻔해 보였지만 왠지 <페이스 메이커>가 보고 싶었다. 시간도 평소에 선호하는 조조가 아니고 극장도 2호선 반대편 코엑스 메가박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 시각에 그 장소에서 그 영화를 관람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화보다 영화 같았다.

약간 늦게 관람석으로 들어가는데 통로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사고가 났나? 안으로 들어가니 스크린 앞에 웬 사람들이 죽 서 있었다. 이건 또 뭐지? 허둥지둥 자리에 앉아 상황을 파악했다. 아니, 이럴 수가! 전혀 몰랐지만, 마침 배우 및 스태프 무대 인사가 있었던 것이다. 안성기, 고아라, 김명민이 바로 20m 앞에 서 있었다. 진짜 잘생기고 예쁘고 멋지더라. 그 가운데 고아라는 완전히 인형이다, 인형.

이게 다가 아니었다. 사회를 보며 진행하는 사람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누굴까, 누굴까. 아, 얼굴이 희멀게져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뻑뻑한 경상도 사투리와 허술한 얼굴이 영화판에서 일할 거라며 술자리에서 말했던 국문과 후배 녀석 같았다. 집에 와서 검색해서 나온 이름이 윤기호다. 맞다, 맞아. 늘 초췌한 모습으로 자신의 꿈을 좇아 필사적으로 매달리더니, 드디어 당당히 프로듀서로서 첫 영화를 제작한 것이다. 유명 배우들을 목격했다는 신기함보다 우연히 이 착하고 성실한 후배의 데뷔에 참석하고 축하할 수 있었다는 기쁨이 나를 무척 들뜨게 했다.

뭐, 이 영화는 비평과 흥행에서 실패할 공산이 크긴 해도 첫 도전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힘내서 더 멋진 작품 계속 제작해 주기를 바란다.

by 소갈비맛나 | 2012/01/22 22:53 | 잡담 | 트랙백 | 덧글(0)

악전고투! 2011 연말정산

세상에, 살다 살다 이런 일이 또 있나. 프린터 드라이버를 설치조차 할 수 없었다. Windows 7과 XP 두 컴퓨터에서 모두다. 프린터 브랜드도 HP란 말이다. 더 웃기는 건 가까스로 설치한 다른 사람 컴퓨터는 인쇄하면 멈추지 않고 내용물을 무한정 뽑아낸다는 사실. 결국, 이틀간 20층에서 12층을 두 번 왔다갔다한 끝에 국세청 증빙서류와 기본 양식을 출력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었다. 동생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넣기로 한 부모님 부양가족 공제를 받으려면 국세청 간소화 사이트에 부모님께서 직접 사실확인을 위해 인증해야 한단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일주일 전 라오스로 여행 떠나셨고 어머니는 손주 봐 주느라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필사적으로 예전 기억을 더듬어 가며 구글 님에게 도움을 청하니 '가족관계 증명원'이라는 서류를 받으면 굳이 인증하지 않더라도 인적공제는 적용할 수 있다는 정보를 알려 주시더라. 가벼운 마음으로 집 바로 옆 주민센터가 문을 열자마자 발급해서 일단락했다.

필요한 서류는 다 갖췄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점검에 돌입. 그런데 장기 주택마련 저축 공제를 받으려면 주민등록 등본도 한 통 필요하다는 걸 확인했다. 뭐, 등본쯤이야. 예전 선릉역 안에 무인 민원 발급기가 있으니 점심 먹고 가볍게 떼야지. 가볍기는 개뿔. 주민등록증으로 신분 확인할 줄 알았으나 희한하게 지문인식 시스템이었고, 나를 포함해 발급받으려는 사람의 반 이상이 인식 연속 실패로 포기해 버렸다. 만만하게 생각했다가 큰일 났다. 정산 서류 마감은 이제 세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근처 동사무소를 검색해 보니 역삼 2동 주민센터가 있긴 하지만 딱 보니 걸어서 25분 거리다. 잠시 PM들과의 회의에 참석하고 끝나자마자 후다닥 걸어갔다. 다행히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주민센터라 한산해서 바로 발급받고 귀환. 이로써 연말정산 자료 구비 완료다.

가정산한 예상금액은 놀랍게도 100만 원이 넘는다. 온 가족이 내 명의로 체크카드를 사용했고, 부모님 두 분을 부양가족으로 등록했으며, 장기 주택마련 저축을 꾸준히 납입한 덕분인 듯하다. 귀찮아도 부지런히 돌아다닌 보람이 있다. 내년에도 비슷한 삽질을 반복할 것 같아 벌써 짜증은 나도, 어렵게 돌려받는 환급금으로 어머니가 바라는 조그만 커피포트와 대용량 통돌이 세탁기를 사 드릴 생각을 하니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2월 월급날이여, 어서 오라!

by 소갈비맛나 | 2012/01/20 23:29 | 잡담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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