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3 첫인상

단순해서 좋다. 화려해서 좋다. 번잡해서 좋다.

플롯과 경로, 전투, 성장, 조작, UI, 보상, 제작 등 모든 요소가 단순하다. 일각에서는 복잡하지 않아서 오히려 재미없다고 하는데, 나처럼 일상에 찌들어 학습 없이 즐기기만 바라는 사람이나 이런 부류의 게임이 익숙지 않아 어려워하는 대부분 일반인에게는 반대로 진입 장벽이나 스트레스가 매우 낮다는 크나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동시에 극도로 화려하다. 그래픽 품질을 '낮음'으로 설정해도 기본적인 비주얼이 무척 뛰어나며, 애니메이션과 시각효과도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최고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배경 음악과 음성효과 역시 낭만적이며 진지하고 무게감 있다. 우리가 바라는 어둡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정확히 구체화했다고 할 수 있다.

번잡하다는 측면은 지루하지 않게 피드백이 끊임없이 온다는 얘기다. 사소한 업적이라도 꾸준히 나타나며, 친구 등록한 플레이어의 활동도 쉼 없이 보이기 때문에 시시각각 변화를 감지하며 좀 더 진행하고 싶다는, 계속 뭔가 더 성취하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한다. 실제 게임 진행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이템 수집(farming)은 3편에 와 극에 달해서. 초반부터 상위 단계 몬스터와 아이템을 수시로 제공하는 구조를 이루었다. 정신은 없어도 너무나 즐겁다.

서버 상태만 잘 관리해도 흠 잡을 데 없는 작품으로 인정받을 텐데.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시작하려고 디지털 다운로드 구매까지 했건만. 현재 총 플레이 시간은 5시간 수준. 이 나이에 한 시간 넘게 비밀번호를 Ctrl+V 신공으로 반복 입력해야겠느냐고.

by 소갈비맛나 | 2012/05/18 23:18 | 놀이 | 트랙백 | 덧글(0)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일

경상도 출신 아버지를 둔 사람은 공감할 텐데, 이쪽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정말 투박하기 그지없다.

자애롭게 조언하기보다는 늘 엄하게 꾸짖으시며, 내가 농담 한마디 잘못 했다간 불호령이 떨어진다. 당연히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함께하는 일은 물론 일상적인 대화조차 급격하게 줄어든다. 생물학적으로만 부자지간이지 남남이나 마찬가지.

이대로 있다간 정말 무덤덤하게 영원한 이별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무엇인가 같이 하면서,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훈훈한 관계를 조금이나마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운전 연수를 아버지에게 받기로 했다.

성격 급하고 화 잘 내는 성격인지라 좋은 의도로 시작했으나 결말은 무척 나쁠 수도 있다. 심하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서먹서먹한 관계로 악화할 수도 있다. 아버지가 동생에게 운전 교육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언쟁이 수차례 벌어진 전례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환갑을 훌쩍 지나 이제 칠순을 바라보고 있으며, 집안의 고질병인 고혈압 때문에 매일 혈압을 점검하시며 약까지 복용하고 계시다. 더 늦기 전에, 모험일 수도 있지만, 작은 일 하나라도 시도해 보아야 한다.

시작하는 날은 이번 주 일요일 아침. 차와 사람, 부자의 관계 모두 무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

by 소갈비맛나 | 2012/05/16 23:23 | 잡담 | 트랙백 | 덧글(0)

내 스승은 superego

길을 제시해 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지 다독여 주거나 혹은 꾸짖어 줄 수 있는 존재는 나 자신, 즉 초자아(superego)뿐이다.

어느 당원이 분신했다는 소식에도 여전히 몰아치는 잔혹한 비난들, 결코 좋은 결말로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담당 프로젝트의 갑갑한 개발 상황, 그리고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고 무리해서 더 나아갈 수도 없는 감정의 응어리. 이러한 거대한 아픔과 혼돈 속에서도 나의 초자아는 냉랭히 명령한다. "현재 시점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은 무리 없도록 팀 일정을 조정하며 팀원 업무 피드백을 주는 것과, ISTQB 오늘치 공부 분량을 계획대로 소화해 내는 것이다. 다 마치면 <디아블로 3>도 좀 하던가."

군말 없이 그대로 다 했다. PM 회의 상황을 파트장들과 공유하며 업무 일정을 조율했고, 이번 주 업데이트 공지문 피드백을 평소보다 더 꼼꼼히 줬으며, 저녁 열 시까지 FL 1회분 모의고사를 전부 풀었다. 심지어 시험은 첫 도전임에도 90점이나 획득했다. 합격점이 고작 65점인데 말이다. 다만, <디아블로>는 서버 장애로 접속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울트라 초자아가 튀어나와도 어쩔 수 없고.

디아블로 광풍에 휩쓸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늘, 스승의 날. 죽을 때까지 함께하며 스승으로 계속 활약할 나의 초자아에게 감사한다. 이 녀석이 더욱 객관적이며 강인해질 수 있도록, 또한 따뜻함의 원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명심 또 명심하자.

by 소갈비맛나 | 2012/05/15 23:24 | 잡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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